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종교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메리 1세, version=461, paragraph=5)] ||이 부분은 [[메리 1세]]에 관한 평가와 결코 분리하여 볼 수 없기에, [[메리 1세]] 항목도 같이 참조하는 것을 추천한다.|| 엘리자베스는 [[프로테스탄트]]로서,[* 정확히 말하면 모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 우호책을 취한 게 아니며, 비(非) [[성공회]]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적대적인 탄압책을 폈다.] 종교 정책이 언니인 [[메리 1세|메리]]와는 방향이 정반대일 뿐 강경함에서는 거의 언니를 빼다박았다.[* 이 부분을 읽는 유저들은 근래 역사학계의 시선이, 대중 역사서의 서술에 비해서 엘리자베스에게 너무나 비우호적이라 느낄 수 있는데, 이는 휘그 사관{{{-2 (Whig history)}}}의 오류가 정정되면서 생긴 차이이다. 휘그 사관{{{-2 (Whig history)}}}은 18 ~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사 해석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역사관으로, 영국의 역사를 ㄱ.) [[입헌군주제]], ㄴ.) [[의회민주주의]], ㄷ.)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발걸음으로 해석하는 목적론적{{{-2 (theological)}}}이고 결정론적인 역사관이다. 휘그 사관은 여기서 이 '''목적'''을 위한 엔진으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를 꼽는다. 이러한 목적론적 역사관에 사실을 끼워맞추다보니 동시대의 두 여왕 자매가 거울에 비친 듯한 종교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는 '''영국사의 흐름을 거스른 일탈 내지는 반동'''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휘그 사관에 부합하는 모범적 왕'''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휘그 사관은 엄청난 반박들에 부딪혔으며, 학계 다수설의 위치를 상실하였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휘그 사관'''이라는 말이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역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휘그 사관이 역사학적으로 그릇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문학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소설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와 [[먼나라 이웃나라|아동용 만화책]] 등에서는 여전히 즐겨 쓰인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문학적 내러티브는 깔끔하고 재미있으며 극적이지만, 그만큼이나 현대적 역사 서술에서는 피해야 할 태도이다. 사학자 Eamon Duffy가 괜히 학술서적도 아니고 대중서적인 《[[울프 홀]]》을 자기 학술서에서 직접 언급하며 비판한 게 아니다.] >Elizabeth I, the 25-year-old daughter of Henry VIII and Anne Boleyn, ascended her throne on 17 November 1558. At first her emphasis was on a religious settlement. Her personal credo remains elusive, but she may originally have aimed to revive her fathers religious legislation, to re-establish her own royal supremacy and the break with Rome, and to permit communion in both kinds (bread and wine) after the reformed fashion, but nothing else. ... And yet, while the Settlement meant that England became officially Protestant, a huge missionary effort to win the hearts and minds of parishioners (especially those in remoter counties and borderlands) lay ahead. Outside London and the towns, the South-East, and East Anglia, Catholicism still predominated: the bishops and most parochial incumbents were Marians, and committed Protestants were a minority. Whereas Elizabeth and Cecil inherited all the negative and destructive elements of Henrician antipapalism and Edwardian Protestantism, they had inadequate resources to build the reformed Church, though it is false to see their task purely in confessional terms. >----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인 25세의 엘리자베스 1세가 1558년 11월 17일에 즉위했다. 먼저 그녀가 강조한 것은 종교적 결정이었다. 그녀의 개인적 신앙고백은 애매모호하지만, 그녀는 부친의 종교 법령들을 목표한 것으로 보인다. 곧 지상권을 재확립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개신교에 따라서 양형성찬{{{-2 (빵과 포도주)}}}을 하되 그 외의 것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 그러나 종교적인 결정으로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은 교구민들(특히 먼 지역과 국경의 교구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런던, 사우스이스트, 이스트앙글리아 바깥에서는 가톨릭이 여전히 다수였다: 주교들과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은 메리 시대의 사람이었고, 헌신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소수였다. 반면 엘리자베스와 세슬은 헨리의 반교황주의와 에드워드의 개신교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들을 상속 받았다. 비록 순전히 교파적인 용어들로 보는 것은 잘못이겠으나, 엘리자베스와 세슬은 개혁된 교회를 건설할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 >[[https://en.wikipedia.org/wiki/Kenneth_O._Morgan|Kenneth O. Morgan]] 편집, [[https://www.amazon.com/dp/B008AUHE7E/ref=mp_s_a_1_2?crid=2MHFPU8FEG3QO&keywords=oxford+history+of+britain+2010&qid=1693587566&sprefix=oxford+history+of+britain+2010%2Caps%2C416&sr=8-2|《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ebook] 물론 '이론상으론' 종교적 적대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하였기에 '종교 때문에 죽은 사람의 공식적인 숫자'는 메리보다 확연히 적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Protestant_martyrs_of_the_English_Reformation|메리 시대 5년 간 개신교도 284명 처형, 34명 옥사]]인데 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는 재위 기간이 45년임에도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atholic_martyrs_of_the_English_Reformation#Decrees_of_Elizabeth_I|9명 처형, 9명이 옥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Marshall_(historian)|피터 마셜(Peter Marshall)]]이 그의 저서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070?_s=instant&_q=%EC%A2%85%EA%B5%90%EA%B0%9C%ED%98%81&_rdt_sid=search_instant&_rdt_idx=4&_rdt_arg=%EC%A2%85%EA%B5%90%EA%B0%9C%ED%98%81|「종교개혁」]]에서 지적하듯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도덕적 우위를 호소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을 '이단 혐의'가 아니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죽었는지를 가지고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는 것은 어렵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Marshall_(historian)|피터 마셜(Peter Marshall)]],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070?_s=instant&_q=%EC%A2%85%EA%B5%90%EA%B0%9C%ED%98%81&_rdt_sid=search_instant&_rdt_idx=4&_rdt_arg=%EC%A2%85%EA%B5%90%EA%B0%9C%ED%98%81|「종교개혁」]],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2017, [ebook][* 원서: Peter Marshall, [[https://www.amazon.com/Reformation-Very-Short-Introduction-Introductions-ebook/dp/B003E1BGLE/ref=sr_1_1?crid=25MAXI9IQVGHJ&keywords=the+Reformation+very+short&qid=1656374014&s=digital-text&sprefix=the+reformation+very+short%2Cdigital-text%2C256&sr=1-1|《the Reform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2009] '공식적인' 희생자 숫자의 논리를 그대로 쓴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공식적으로'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오히려 엘리자베스는 반란과 엮여 있는 건수를 제외하고, 순수 가톨릭 신심 행위만으로 200명을 처형했다. 여기에 다른 비성공회 개신교에 대한 박해까지 추가하면 더 늘어난다. >The regimes of Henry VIII, Edward VI, Elizabeth and James I all put Protestants to death as well, for beliefs that were more radical than those permitted by the established Church of the time. In addition, Elizabeth executed almost 200 Catholics, in theory for treason but actually just for attempting to practise their religion. The executions that followed the rebellion of the northern earls add another couple of hundred to that figure. >----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모두 개신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당대 국교회가 허용하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이유로.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2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론상으론 반역죄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가톨릭 신심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별개로 북부 백작들의 반란에 이어 일어난 처형 건수 수백명이 있다. >---- >[[https://en.wikipedia.org/wiki/Ronald_Hutton|Ronald Hutton]], [[https://www.amazon.com/Brief-History-Britain-1485-1660-Dynasties-ebook/dp/B0056A8UU6/ref=tmm_kin_swatch_0?_encoding=UTF8&qid=&sr=|《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오히려 엘리자베스는 초기 치세에 언니인 메리보다 '''종교 정책에서의 더욱 낮은 지지'''를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받았다..[* 엘리자베스 치세를 초기로 한정한 이유는 에드워드{{{-2 (6년)}}}나 메리{{{-2 (5년)}}}에 비해 훨씬 오래 재위{{{-2 (45년)}}}하였기 때문이다.] >The total import of the evidence of both rebellion and will-making is that Mary's Catholicism attracted more spontaneous support from the English than Edwardian Protestantism or that of the early reign of Elizabeth. >전체적인 반란과 유언서들의 증거들을 종합해볼때 '''메리의 가톨릭 신앙은 에드워드의 개신교 신앙이나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의 그것보다 더욱 자발적인 지원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 유언장을 조사한 이유가 의아할 수 있는데, 튜더 시대 잉글랜드는 소수의 열렬한 특정 교단 신자들과 대다수의 방관자들로 구성되어있기에 정확한 종교 통계를 위해선 당대인들이 남긴 유언장에 어떤 신심이 들어가있는지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 >Ronald Hutton, [[https://www.amazon.com/Brief-History-Britain-1485-1660-Dynasties-ebook/dp/B0056A8UU6/ref=tmm_kin_swatch_0?_encoding=UTF8&qid=&sr=|《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the overall conclusion must still be that it was Marys Catholic Church that was the most popular among the English as a whole, and that had she reigned for even half as long as Elizabeth did let alone had she ruled for as long, and produced a Catholic heir then England would have been a Roman Catholic nation ever since. >---- >전체적인 결론은, 잉글랜드인에게 전체적으로 가장 인기 있던 건 메리의 가톨릭 교회라는 것이며,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절반 기간만 다스렸어도 ㅡ 그녀가 치세 동안 가톨릭 상속자를 낳았을지를 논외로 하더라도 ㅡ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 >Ronald Hutton, [[https://www.amazon.com/Brief-History-Britain-1485-1660-Dynasties-ebook/dp/B0056A8UU6/ref=tmm_kin_swatch_0?_encoding=UTF8&qid=&sr=|《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게다가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 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성직자)|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 이 여성의 집은 현재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 게다가 이 여성은 처형당할 때 [[임신부]]였다.]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게 없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근대 초의 유럽 군주 중 '''특별하게''' 엄청나게 잔혹했다거나 하면서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이는 (언니인 메리 1세에게서도 보듯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근대 초 유럽 군주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잔혹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잔혹성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특별히 예외로 취급하여, 휘그 사관의 재미있는 문학적 [[내러티브]]를 위해 사실을 끼워맞추는 것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할 태도이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유럽 군주들이 그러하듯이 잔혹함과 개인적인 종교적 호오가 결합된 '''[[근대]] 초 유럽 군주'''로 봐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